내란의 공간

12·3 비상계엄의 공간을 다시 밟는다.
그곳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다.

내란의 공간

⑦ 국회

‘코드 원’ 전화 뒤 ‘의원 끌어내라’ 시작됐다

국회는 위헌·위법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헌법기관이다. 윤석열은 무장군인을 동원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라는 ‘통제장치’를 망가뜨리려 했다.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특전사 부대원을 태운 헬기가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연합뉴스

12·3 비상계엄이 선포되자, 특전사 부대원을 태운 헬기가 국회의사당으로 향했다. ⓒ연합뉴스

“부대원들 국회의사당으로 출동시키고, 직접 국회로 가서 지휘하라.” 2024년 12월3일 오후 10시31분 김현태 특전사 제707특수임무단 단장(이하 당시 직책)에게 ‘국회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훈련도 한번 해본 적 없는 장소였다. 국회 내부 구조도 전혀 알지 못했다.

곽종근 특수전사령관이 내린 임무는 ‘즉시 국회로 출동해 국회의사당 본청 및 국회의원 회관 건물을 봉쇄하라’는 게 전부였다. 무슨 목적으로, 어떻게 국회를 봉쇄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지침은 없었다. 김현태 단장도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곧바로 병력을 집합시켰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상황에서 즉시 출동하라는 지시를 받았으니 그저 서둘러 출동시켜야 된다는 생각 뿐이었다(2024년 12월18일 김현태 단장 검찰 진술).”

준비된 작전이긴 했다. 그런데 당초 목적지는 국회가 아니었다. 비상계엄 이야기도 없었다. 그날 오전 11시경 곽종근 사령관이 김현태 단장에게 “오늘 부대원들 비상소집시켜서 불시 점검하라”고 지시했다. 오전 11시48분 김세운 특전사 특수작전항공단(특항단) 단장(대령)은 “사령관께서 금일 가용한 헬기가 몇 대인지 물어봤고, 707특임단과 야간 훈련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라고 전했다.

김현태 단장은 김세운 단장과 함께 헬기를 이용한 야간 훈련 계획을 세웠다. 논의 끝에 결정된 그날 야간 훈련의 이름은 ‘불시 출동태세 점검 및 불순세력 비살상무기 제압 훈련’. 특항단에서 헬기 12대를 707특임단 으로 보내면 헬기 한 대에 8명씩 총 부대원 96명이 타고 특수전학교 내 훈련장에 착륙한다는 계획이었다.

훈련은 예정대로 진행됐다. 김현태 단장이 오후 7시50분 퇴근한 부대원들에게 비상소집을 지시하자, 오후 8시53분 전원 출동준비를 완료했다. 그 상태에서 헬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당초 특항단이 오후 9시쯤 헬기를 보낼 예정이었다. 그런데 한 시간이 지난 오후 10시가 다 되어가도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헬기 안 보내주느냐?” 김현태 단장이 묻자, 김세운 단장은 “사령관님이 보내라고 해야 보내는 거다”라고 답했다. 그렇게 무작정 시간이 더 흘렀다.

헬기 도착지가 바뀌었다

훈련을 마치려던 오후 10시20분, 곽 사령관에게 전화가 왔다. “훈련 취소된 거 아니니 좀 더 대기하라.” 3분 뒤인 오후 10시23분 윤석열이 대국민 담화를 시작했다. 다들 TV 앞에 모이던 오후 10시27분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그뒤 곽종근 사령관이 특전사 제707특수임무단과 제1공수특전여단에 국회 출동을 지시했다. 두 부대 모두 평시에는 대테러, 전시에는 북한 지역 표적 제거 등의 임무를 맡는 특전사 ‘최정예 부대’다. 특전사는 12·3 비상계엄 당시 1공수 403명, 707특임단 197명 등 가장 많은 부대원을 국회로 보냈다.

국회는 위헌·위법적인 비상계엄이 선포됐을 때 이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헌법기관이다. 국회가 재적의원 과반수 찬성으로 계엄 해제를 요구하면, 대통령은 지체 없이 계엄을 해제해야 한다(헌법 제77조, 계엄법 제11조). 윤석열은 ‘질서 유지’ 목적으로 계엄군을 국회에 투입했다고 주장하지만, 곽종근 사령관과 국회로 출동한 특전사 1공수와 707특임단 현장 지휘관·부대원들의 이야기는 전혀 다르다. 그들의 검찰 진술을 종합하면,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무장군인을 동원해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라는 ‘통제 장치’를 망가뜨리려 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 707특임단이 있었다.

그날 밤, 오후 11시22분부터 11시43분까지 김현태 단장을 포함해 707특임단 96명을 태운 헬기 12대가 경기도 이천 특전사 사령부에서 순차적으로 이륙했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1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출동 지시 이후, 헬기 예열·이륙 준비에 최소 30분의 시간이 소요됐다). 윤석열은 직접 작전을 챙겼다. 오후 11시40분경 윤석열은 곽종근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707특임단이 어디쯤 갔는지 물었다.

707특임단이 출발한 특전사 사령부에서 국회까지는 “통상 헬기로 15분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2024년 12월18일 김현태 단장 검찰 진술)”다. 그런데 수도권 비행제한구역을 통제하는 수방사가 경기 용인 일대 상공에서 특전사 헬기를 막아 세웠다. 김문상 수방사 작전처장은 “사전에 계획되어 있지 않았고, 비행 목적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라고 4월24일 피고인 박안수 육군참모총장·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 공판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 시각 특전사 지휘부가 발칵 뒤집혔다. 김용현 국방부 장관은 곽종근 사령관에게 수차례 ‘헬기가 국회에 언제쯤 도착하느냐’라는 독촉 전화를 걸었다. 곽 사령관은 다급하게 현장 상황을 확인하며, 수방사에 비행 승인을 요청했다. “사령관님이 헬기가 이동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 계속적으로 확인하셨고, 헬기가 국회에 내려 진입하는 과정에서 위에서 연락이 지속적으로 오고, 사령관은 현장 지휘관들과 통화해 상황을 확인하고 보고하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엄청 혼란스러운 상황이 계속 진행됐다(2024년 12월23일 특전사 이 아무개 대위 군검찰 진술).”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49분, 첫 번째 헬기가 국회 운동장에 착륙했다. ⓒ국회사무처제공

2024년 12월3일 오후 11시49분, 첫 번째 헬기가 국회 운동장에 착륙했다. ⓒ국회사무처제공

오후 11시49분, 첫 번째 헬기가 국회의사당 뒤편 운동장에 착륙했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1시간22분, 헬기가 이륙하고 27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김현태 단장은 헬기 이륙 직전, 티맵(지도 앱)을 보고 급하게 ‘국회 봉쇄’ 작전을 구상했다. 티맵으로 국회 구조를 확인한 뒤, 그걸 바탕으로 707특임단 1지역대·7지역대·9지역대가 국회 본청을, 3지역대가 국회 의원회관을 맡아 건물을 봉쇄한다는 목표였다. “도착해서 건물 외부에서 출입문을 잠그고 외부에서 들어오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출입문은 케이블타이로 묶는 등의 방법으로 잠가놓으려고 했다(2024년 12월18일 김현태 단장 검찰 진술).”

707특임단은 헬기에서 내려, 가까운 국회의사당 본관 후문으로 곧장 향했다. 그때 후문 근처에 10여 명이 보였다. 김현태 단장은 케이블타이로 묶어 일단 후문을 막고, 순차적으로 다른 출입문을 묶어 국회의사당 본청을 봉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 단장의 짐작과 달리, 국회 후문 출입구는 케이블타이로 묶을 수 없는 자동문 형태였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10여 분이 지났다.

다른 방법을 찾기 위해 건물을 돌아 국회의사당 본청 정문으로 향했다. 12월4일 오전 0시10분경 정문에 도착하자 후문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국회의원들이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을 가결시키기 위해 하나둘 정문을 통과했다. 국회 관계자, 국회의원 보좌진, 기자 등 수백 명이 정문 앞에 운집해 있었다. 그들은 총을 든 계엄군이 국회의사당 본청 내부로 진입하지 못하도록 국회 본청 정문을 맨몸으로 막아섰다. 정문 출입구를 확보하려는 707특임단과 막으려는 시민들 사이 밀고 밀리는 대치 상황이 30여 분간 계속됐다.

그즈음 특전사사령부 전투통제실에 있던 곽종근 사령관의 비화폰이 울렸다. 윤석열이었다. 오전 0시30분경 윤석열은 “아직 의원 정족수가 채워지지 않은 것 같다. 빨리 국회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안에 있는 인원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라”고 명령했다. 윤석열의 지시에 특전사 임무는 ‘국회 봉쇄’에서 ‘의원 끌어내기’로 빠르게 바뀌었다. 곽 사령관은 3월 〈시사IN〉과의 서면 인터뷰에서 “당시 ‘본회의장 진입’은 (0시30분경) 대통령의 두 번째 통화 이후에야 인식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12·3 비상계엄 당시,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 3층 본회의장 인근 복도에서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12·3 비상계엄 당시,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 3층 본회의장 인근 복도에서 진입을 시도하고 있다. ⓒ시사IN 박미소

윤석열에게서 전화가 온 뒤, 상황은 더 폭력적으로 전개됐다. 의원들을 끌어낼 방안으로 테이저건과 공포탄 사용, 단전이 언급되기 시작했다. 당시 전투통제실에 함께 있던 김영권 특전사 파견 방첩사 방첩부대장은 “국회 본회의장 의석이 차 가면서 분위기가 점점 달라지고, 급기야 대통령이 곽종근 사령관에게 전화를 하고 사령관이 ‘들어가겠습니다’를 반복하면서 상황이 심각해졌다. ‘코드 원(대통령)’과의 통화가 이루어지고 나서 이전과는 달리 테이저건, 공포탄, 본회의장 강제 단전 이야기까지 나왔다”라고 2024년 12월24일 검찰에 진술했다.

‘의원을 끌어내라’는 윤석열의 지시는 현장에 빠르게 전파됐다. “담 넘어가.” 오전 0시30분 이상현 1공수여단장(준장)도 국회에 도착한 김형기 1공수 1특전대대장(중령)에게 첫 지시를 내렸다. “거기 내려서 담 너머로, 국회 본관으로 들어가, 알았지?” “본관으로 들어가서 의원들 다 끄집어내.” 김형기 대대장은 “예 알겠습니다. 단결”이라고 답한 뒤, 부하들에게 “담 넘을 수 곳이 있는지 파악해보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에게 왜 담을 넘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본인도 이상현 여단장의 지시가 이해되지 않아서다.

시민들 반응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

김형기 대대장의 지시를 받아 국회로 출동한 특전사 양 아무개 대위는 “국회에 도착해서야 국회로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았다(2024년 12월25일 검찰 진술).” 김형기 대대장이 별다른 이야기 없이 먼저 국회 담을 넘는 걸 보고, 곧바로 따라 담을 넘었다. 그 뒤로 부대원들이 줄줄이 담을 넘자 시민들이 이들을 잡아당기며 말렸다. 김형기 대대장은 여전히 의아했다. ‘시민들은 우리가 지켜야 할 대상인데, 왜 우리를 때릴까.’ 일단 부하들에게 “시민들이 격해지고 부대원들이 다칠 것 같으니 (이미 담을 넘은 49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돌아가 버스에서 대기하라”고 지시했다. 담을 넘은 인원은 국회의사당 정문 쪽으로 이동했다.

오전 0시35분 우원식 국회의장이 비상계엄 해제요구안 의결을 위해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에 착석했다. 4분 후인 오전 0시39분 이상현 여단장의 두 번째 지시가 떨어졌다. “국회의사당 본관으로 가서, 지금 (국회의원) 애들이 문 걸어 잠그고 의결하려고 하고 있대. 문짝 부숴서라도 다 끌어내.” 본청 정문은 여전히 계엄군을 막기 위한 시민들로 가득했다. 또다시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 대치 상황이 벌어졌다. 김형기 대대장의 시야에 흥분하는 부대원들이 보였다. “민간인과 접촉하지 마” “뒤로 빠져” 김형기 대대장이 명령했다.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시민들은 총을 들고 국회로 들어가려던 계엄군의 마음에 돌을 던졌다. 부대원들은 시민들의 반응을 보며 자신이 ‘정당하지 않은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걸 깨닫게 됐다. 특전사 양 아무개 대위는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만 해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담을 넘어가는 과정에서 시민들로부터 저항을 받고, 담을 넘어 국회 안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계속 시민들이 저희를 막아서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검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작전은 계속됐다. 오전 0시48분부터 707특임단 소속 101명이 추가로 국회에 배치되기 시작했다. 김형기 대대장은 국회 본청 후문을 뜯었다. 김현태 단장도 마찬가지였다. “창문을 깨라”는 김현태 단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707특임단 부대원들은 팔꿈치, 소총 총구 소음기, 망치로 국회 본청 2층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실 창문을 깨부쉈다. 1공수와 707특임단 부대원들이 속속 국회 본청 내부로 진입하자, 국회 관계자들은 온갖 집기를 동원해 본회의장 출입문에 바리케이드를 쳤다. 소화기를 뿌리고, 온몸으로 저항하며 계엄군을 막았다. 초조한 마음으로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이 가결되길 기다리면서 말이다.

시민들과의 대치 상황이 특전사 지휘부에도 전달됐다. “150명이 되면 안 되는데 못 들어가냐?” 곽종근 사령관이 물었다. 김현태 단장은 “지금 못 들어갑니다”라고 답했다. 김형기 대대장도 오전 1시경 이상현 여단장에게 상황을 보고했다. “후문으로 문은 부수고 들어왔는데, 내부 안쪽 두 번째 문을 지금 돌파 못하고 그쪽에서 소화기하고 소화전으로 지금 격렬히 저항하고 있습니다.” 이상현 여단장은 국회 내부로 진입한 1공수 인원수를 확인하더니, “대통령님이 문 부숴서라도 끄집어내 오래”라며 재차 명령을 내렸다.

김형기 대대장은 지시를 더 따르지 않았다.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다. “만약 내가 정말로 여단장님의 지시를 이행할 마음을 먹고 부대원에게 지시를 하달했다면, 부대원들은 금방 대치하던 사람들을 제압한 후 그 안으로 들어가 유리를 깨거나 문을 부술 수 있을 것이고, 실제 국회의원들을 끄집어내었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는 데 얼마 시간도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이 생기면 안 될 것 같아 지시를 내리지는 않았고 대치 상황이 계속됐다(2024년 12월20일 김형기 대대장 검찰 진술).”

이 작전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잠시 후인 오전 1시2분 국회 로텐더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국회 본회의에서 재석 190명 전원 찬성으로 비상계엄 해제요구안이 가결됐다. “이제 여기 있으면 안 된다. 군인들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 “더 이상 이럴 필요 없다.” 누군가 김현태 단장에게 말했다. 여기저기 환호성이 들리고 무언가 끝난 분위기였다. 오전 1시7분 김현태 단장은 곽종근 사령관에게 전화해 “뭐가 가결되었다고 하면서 나가야 된다고 한다. 여기 더 이상 있으면 안 될 것 같다”라고 보고했다. 곽종근 사령관이 철수를 지시했다.

2024년 12월4일 새벽 국회 관계자들이 12·3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 가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2024년 12월4일 새벽 국회 관계자들이 12·3 비상계엄 해제요구 결의안 가결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

같은 시간 김형기 대대장도 이상현 여단장에게 전화를 받았다. “형기야 가결됐어. 너희들 더 이상 진입하지 마.” 모든 부대가 곧바로 철수에 나선 건 아니다. 김형기 대대장이 부대원들과 함께 국회 본청을 빠져나가던 시각, 본청 후문에서는 “철수하라”와 “대기하라”는 말이 번갈아 나왔다. 당시 부대원 136명을 국회로 보낸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1경비단도 철수 지시를 받지 못했다. 조 단장은 현장 지휘관에게 ‘제707특수임무단이 빠지고 있는 것 같다’는 보고를 받고, 이진우 수방사령관에게 퇴출을 건의한 뒤에야 부대원들을 철수시킬 수 있었다.

특전사의 ‘국회 봉쇄’ 작전은 실패했다. 출동이 지연되면서 시민들이 계엄군보다 국회에 먼저 도착했다. 대부분의 출동 군인은 왜 국회에 가야 하는지조차 몰랐다. 작전은 엉성했다. “소위 군사작전이라고 하면 예행 연습도 좀 해야 하고, 매끄러워야 하는 게 통상적인데…. 나도 군인이지만 ‘이게 뭐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좀 엉성했다. 서울에 헬기가 진입할 때도 차단이 되어서 한동안 못 들어갔다가 그 사태를 해소하는 데 장시간 소요됐고…. 전혀 준비가 안 됐다는 느낌이 많이 들었다(2024년 12월24일 특전사 파견 김영권 방첩사 방첩부대장 검찰 진술).”

하지만 현장 지휘관들의 판단이 달랐다면, 이 작전은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김형기 대대장은 당시 부하들에게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상관의 지시를 전달하지 않았다. 만약 명령했다면? 현장에 출동했던 1공수부대 1특전대대 한 소령의 답이다. “지금은 뉴스 등을 통해 국회에 들어가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려고 시도한 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만약 지금 같은 상황에서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으면 이를 거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당시에는 비상계엄이라는 것에 대한 지식도 없었고 상황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 대대장님이 국회의원들을 끌어내라고 지시하셨다면 그 지시에 응했을 것 같다.”

문상현 기자이은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