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란의 공간
12·3 비상계엄의 공간을 다시 밟는다.
그곳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다.
내란의 공간
⑤ 대통령실
“어, 이거 진짜 하신다” 한덕수 외 10인의 방관자들
그때 윤석열은 국무회의가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실 5층 대통령 집무실 옆 대접견실에 국무위원 10명이 모였지만 아무도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선포를 말리지 못했다.

서울 용산 대통령실. 윤석열이 ‘국무회의’라고 주장하는 2024년 12월3일 ‘5분 회동’은 국무위원들이 윤석열의 일방적인 주장을 듣는 자리였다. ⓒ시사IN 이명익
“대통령님께서 총리, 법무부 장관, 외교부 장관, 통일부 장관, 국정원장, 행정안전부 장관을 빨리 부르라고 하십니다.” 2024년 12월3일 오후 8시 무렵,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온 김정환 대통령실 수행실장이 윤석열의 지시를 강의구 부속실장에게 전달했다. 강 실장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하 각 시점 당시 직책)에게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다.
윤석열도 움직였다. 오후 7시54분 조태열 외교부 장관에게 직접 연락해 물었다. “지금 어디 계십니까? 용산 집무실로 바로 올 수 있습니까? 도착하시면 부속실장이 안내할 것입니다. 부인께도 말씀하시지 말고 오세요.” 뒤이어 오후 8시경 한덕수 국무총리에게 “대통령실로 좀 왔으면 좋겠다. 누구에게도 말을 안 했으면 좋겠다”, 오후 8시6분 김영호 통일부 장관에게 “용산으로 가능한 빨리 들어오라”고 직접 전화해 지시했다(한덕수 총리와 김영호 장관은 이후 윤석열과의 통화내역 기록을 자신의 휴대전화에서 삭제했다).
통상 국무회의는 대통령실 2층 국무회의장에서 열린다. 그런데 이날 김영호 장관이 안내를 받아 간 곳은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한 대통령실 5층이었다. 오후 8시40분쯤 김 장관이 대통령 집무실 옆 대접견실(대회의실)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덕수 국무총리가 들어왔다. “무슨 일 때문입니까?” 김 장관이 물었다. 한 총리는 “대통령께서 계엄을 선포하려고 하는 것 같다”라고 답했다(한덕수 총리는 오후 8시8분 강의구 실장에게 텔레그램 메시지를 보냈고, 강 실장은 이후 해당 내용을 삭제했다). 윤석열이 “국무총리도 들어오라고 하지”라고 말하자, 한 총리와 김 장관이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총리님 왜 반대를 안 하셨어요?”
오후 8시55분쯤 두 사람이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갔을 땐 윤석열과 함께 김용현 국방부 장관, 박성재 법무부 장관,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 있었다. 이상민 장관은 다른 국무위원들과 달리 대접견실을 들르지 않고, 곧장 대통령 집무실로 향한 터였다. ‘1차 호출 멤버(한덕수, 박성재, 조태열, 이상민, 조태용)’ 중 마지막으로 조태열 장관, 조태용 국정원장이 연달아 대통령 집무실에 도착했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하려고 한다”라면서 ‘외교부 장관’ ‘재외공관’이라는 단어가 포함된 문건을 조태열 장관에게 건넸다. 한덕수 총리는 “외교부 장관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었다. 조태열 장관이 “외교적 영향뿐만 아니라 70여 년간 대한민국이 쌓아온 모든 성취를 한꺼번에 무너뜨릴 만큼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문제이니 재고해주십시오”라고 반대하자, 윤석열이 격노했다.

“내 개인을 위해 이렇게 하는 거라고 생각하세요? 법치주의를 신봉하는 내가 오죽하면 이런 생각을 했겠습니까? 종북 좌파들을 이 상태로 놔두면 나라가 거덜나고 경제든 외교든 아무것도 안 될 것입니다. 단기적으로는 어려움이 있겠지만 한·미 동맹 등 대외관계와 외교정책에 전혀 영향이 없을 것이고 그대로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다양한 생각은 이해되고 반대 의견도 있을 수 있지만 국무위원의 상황 인식과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상황 인식은 다릅니다. 이 자리에 있어보지 않으면 모릅니다.”
조태열 장관이 “그동안 야당에서 계엄 얘기만 나오면 정부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떻게 설득하실 겁니까”라고 다시 묻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자리에 있던 한덕수 총리, 김영호 장관, 박성재 장관, 이상민 장관, 조태용 원장 등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이상민 장관은 “그땐 너무 당황하던 상태이고 외교부 장관이 말하고 대통령님이 연이어 말을 해서 중간에 낄 틈이 없었다”라고 2024년 12월16일 경찰에 진술했다). 윤석열은 김용현 장관에게 “방송 대기 중이냐”라고 묻고는 “이제 나가달라”고 말했다. 김용현 장관을 제외한 6명은 달리 어찌하지 못한 채 대접견실로 향했다.
조태열 장관은 맞은편에 앉은 조태용 원장에게 “비상계엄과 관련해 무슨 구체적인 정보 보고라도 있는 거냐?”라고 물었다. 조태용 원장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저었다(조태용 원장은 이날 대통령과 강의구 실장에게 대통령실로 오라는 전화를 받은 뒤, “나에게 총리직 제의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들어갔다”라고 2024년 12월18일 경찰에 진술했다). 유일하게 윤석열 곁에 남았던 김용현 장관이 오후 9시20~30분쯤 대통령 집무실에서 나왔다. 조태열 장관은 김용현 장관을 불러 세워서 “어떻게 된 거냐. 그럼 군대가 이미 다 대기하고 있는 거냐?”라고 물었다. 김용현 장관은 “그렇다. 언론에도 22시에 특별 담화가 있다고 이미 얘기해놨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계획을 바꿀 수 없다”라고 답했다.
30여 분 뒤면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출동하는 상황이었다. 그쯤 윤석열이 대통령 집무실에서 대접견실과 연결된 쪽문으로 나와 한덕수 총리를 불렀다. 한 총리가 혼자 집무실로 들어가 “국무회의를 열어야 한다. 정족수를 맞춰야 한다”라고 하자(한덕수 총리는 이때 윤석열을 만류하며 “다른 국무위원의 말도 들어보시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윤석열은 곧바로 대통령 집무실에 있던 김정환 수행실장에게 추가 지시를 내렸다. 윤석열은 “빨리 (이 사람들을) 불러라”라면서 ‘최상목, 송미령, 조규홍, 오영주, 박상우, 안덕근’ 등 6명 장관 명단을 추가로 읊었다.
‘2차 호출 멤버(최상목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송미령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 오영주 중소기업벤처부 장관, 박상우 국토교통부 장관,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중 한 명이었던 최상목 부총리는 오후 9시37분 강의구 실장에게 “대통령님이 찾으신다”라는 연락을 받았다(오후 9시33분 윤석열, 오후 9시34분 강의구 실장, 오후 9시36분 본인의 수행비서에게 걸려온 전화는 놓쳤다). 가끔 윤석열은 최상목 부총리에게 ‘저녁이나 먹자’며 연락을 해왔다. 비슷한 상황이겠거니 생각했다. 최 부총리가 오후 9시57분쯤 대통령실 5층 대접견실에 도착해 목격한 장면은 상상과는 전혀 달랐다. 최 부총리가 “총리님 왜 반대를 안 하셨어요”라고 따져묻자 한덕수 총리는 “내가 여러 번 반대를 했어요”라고 답할 뿐이었다.

최상목 부총리가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이건 안 된다. 경제와 국가 신인도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에 절대로 안 된다”라고 반대 의견을 냈지만, 윤석열은 “돌이킬 수 없다”라고 답했다. 그즈음 정진석 비서실장을 비롯해 신원식 국가안보실장, 홍철호 정무수석 등 대통령실 참모진도 도착했지만, 아무도 윤석열을 말리지 못했다. 다들 망연자실하고 무기력한 상태로 시간만 흘려보낼 뿐이었다. “당시 분위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회의가 아니었고 접견실에서 대기하는 분위기였다(2024년 12월12일 최상목 경찰 진술).” “회의장에 들어갔을 당시 다들 너무 침묵하고 조용했고, 목소리도 거의 상대방이 듣기 어려울 정도로 작았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무척 조용했다(2024년 12월24일 홍철호 검찰 진술).”
“설마 계엄하러 가신 거야?”
그때 윤석열은 국무회의가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다. 계엄법에 따라,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위해선 반드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12·3 비상계엄 선포 당시 국무회의 심의 참여 대상은 윤석열과 한덕수 총리를 포함해 총 20명이었다. 이 중 과반수인 11명 이상이 출석해야 국무회의를 개의할 수 있었다. 대통령실은 12·3 비상계엄 해제 이후 행정안전부에 보낸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 관련 국무회의록 관련 자료’ 공문에 오후 10시17분부터 오후 10시22분까지 5분간, 대통령실 대접견실에서 계엄 심의 국무회의가 열렸다고 적었다. 참석자는 윤석열, 한덕수 총리, 최상목 부총리, 조태열·김영호·박성재·김용현·이상민·송미령·조규홍·오영주 장관(공문 기재순)이었다.
“나는 너무 충격이 크고 정신도 없어서 회의실(대접견실)에 앉아서 가만히 있었는데, 총리님이 계속 ‘다른 국무위원들에게 빨리 전화를 해라’라고 하는 말씀이 들렸고 이후 오영주 중기부 장관이 나중에 온 것이 기억난다. 그때 누군가가 ‘이제 11명이 다 찼는데 국무회의를 해야 하나’라고 이야기하는 걸 들었다.”
윤석열이 ‘국무회의’라고 주장하는 이날 모임의 마지막 참석자는 오영주 장관이다. 오영주 장관은 오후 9시42분 김정환 실장에게 “대통령실까지 얼마나 걸리시냐. 대통령실로 오시라. 대통령님이 찾으신다. 빨리 오시라”는 전화를 받았다. 윤석열은 조급했다. 10시1분, 10시8분, 10시11분 대통령실에서 오영주 장관에게 연달아 “빨리 오라”는 재촉 전화를 걸었다. 오후 10시17분쯤 오영주 장관이 대접견실에 도착했을 땐, 이미 윤석열이 대접견실로 나와 있는 상태였다. “부속실 관계자에게 11명이 모였다는 소식을 듣고 (윤석열이) 왔다고 생각했다(2024년 12월16일 이상민 경찰 진술).”
그즈음 김용현 장관은 대통령실 부속실로 찾아와 강의구 실장에게 “10부를 복사해달라”며 종이 한 장을 건넸다. ‘비상계엄 선포문’이라고 적혀 있는 문서였다. 강 실장은 직접 10부를 복사해 대접견실로 갔다. 김용현 장관이 국무위원들에게 한 장씩 비상계엄 선포문을 나눠주는 걸 보고 다시 부속실로 돌아왔다. 계엄 심의를 위한 ‘5분 회동’은 윤석열의 일방적인 주장을 국무위원들이 듣는 자리였다. 윤석열은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걱정 많이 하겠지만 이건 누구와 논의할 사항이 아니었다”라며 계엄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곤,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가 ‘근데 (윤석열이) 어디 가신 거야? 설마 하러 가신 거야? 라이브야, 녹화야? 차라리 녹화였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2024년 12월17일 송미령 장관 검찰 진술).” 대접견실에 남은 국무위원들이 혼란에 빠졌다.
그게 전부였다. 비상계엄을 선포하러 브리핑룸으로 이동하는 윤석열을 말리러 따라붙는 국무위원은 없었다. 윤석열에게 비상계엄 선포를 위한 국무회의 심의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으니 무효라고 주장하는 이도 없었다. 비상계엄이 선포된 이후, ‘국무회의 심의 절차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는 무효’라고 언론에 알린 국무위원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가 “어, 이거 진짜 하신다”라며 휴대전화로 윤석열이 대국민 담화를 하는 유튜브 생방송을 틀었다. 오후 10시23분 대국민 담화를 시작한 윤석열은 4분 뒤인 오후 10시27분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한자리에 모인 국무위원과 대통령실 참모진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2024년 12월11일 국무위원들이 일어나 대국민 사과를 하고 있다. 김문수 장관은 사과하지 않았다. ⓒ연합뉴스
각자 윤석열을 막지 못한 이유가 있다고 수사기관에 진술했다. “국무위원들이 비상계엄이 위헌·위법이라는 인식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따지지 않았다(이상민 장관)” “합심해서 대통령의 행동을 막자고 말한 사람도 없었다(조태열 장관)” “나는 대통령과 그 정도의 친분 관계가 없었고 그럴 용기도 없었다(송미령 장관)” “담화를 하러 나가기까지 짧은 시간이어서 대응하지 못했다(오영주 장관)” “내가 그 자리에서 대통령이 밖으로 나가는 걸 막지 못한 건 맞지만, 대통령이 나가서 이미 계엄 선포를 했는데, 그때 언론에 알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냐(최상목 부총리)” “여러 국무위원들이 모이고 나서 내가 했던 말은 기억나지 않는다(한덕수 총리)”
위헌·위법한 계엄을 막을 수 있던 ‘최후의 보루’였던 국무위원들이 각자의 이유에 따라 방관하는 사이, 계엄군은 국회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작전지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