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란의 공간
12·3 비상계엄의 공간을 다시 밟는다.
그곳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다.
내란의 공간
④ 대통령 안가·관저·국방부 장관
술자리에서 짜여진 작전
12·3 비상계엄은 준비된 작전이었다. 대통령 안가와 대통령 관저는 ‘내란 모의’를 위한 아지트로 쓰였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 있는 대통령 안전가옥. ⓒ시사IN 이명익
개인 차로는 곧장 갈 수 없는 곳이었다. 안내받은 대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 한 건물 지하주차장에 도착하니 관용차 한 대가 준비돼 있었다. 그 차로 갈아탄 뒤 2~3분 거리의 한옥 형태의 집에 들어섰다. 정원을 지나 경호원이 안내하는 쪽의 방문을 열자 윤석열이 나타났다. 도착한 곳은 대통령 안가(안전가옥)였다. 대통령 안가는 대통령이 누군가를 비밀리에 만날 때 사용하는 공간이다. 4월10일 총선을 목전에 둔 2024년 3월 말의 어느 저녁, 이곳에 윤석열과 김용현 경호처장(이하 당시 직책), 신원식 국방부 장관, 여인형 방첩사령관, 조태용 국정원장이 모였다. 조태용 원장을 제외하곤 모두 군 장성 출신이다.
윤석열은 술을 마시며 야당과의 관계에 대한 답답함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취하고부턴 목소리를 높여 화를 냈다. 정부가 주도하는 ‘의료 개혁’에 의료계가 반발해 난항을 겪고, 여론에 역풍이 이는 데 대해서만 혼자 1시간 가까이 떠들었다. 그리고 이 얘기를 꺼냈다. “정상적인 정치 상황으로 가기 굉장히 어려워졌다. 비상한 조치가 필요하다. 군이 나서서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느냐.” 군이 정치 상황에 개입해 적극 역할하는 ‘비상한 조치’, 계엄을 떠오르게 하는 말이었다. 계엄이 선포되면, 현역 군 장성 중에서 임명되는 계엄사령관이 계엄 지역의 모든 행정사무와 사법사무를 관장하게 된다.
신원식 장관은 곧장 반대했다. “내가 법은 잘 모르겠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나 당위성 면에서는 적절하지 않다. 국민이 용납하지도 않고, 장병들은 국민과 100% 생각을 같이한다. 그건 현실성도 없다.” 조태용 원장도 국제관계를 언급하며 ‘외국에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나라 국격에서 생각할 수도 없다’라는 취지로 반대했다. 김용현 처장과 여인형 사령관은 별다른 말이 없었다. 신원식 장관의 기억대로라면, 윤석열은 신원식·조태용 두 사람이 반대하자 그 자리에서 군의 ‘비상한 조치’ 이야기를 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계획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사령관의 검색어 ‘국회 해산 가능한가요’
2024년 4월 총선에서 당시 여당인 국민의힘은 108석을 얻는 데 그쳤다. 윤석열은 2024년 5~6월쯤 저녁 김용현 처장을 안가로 다시 불렀다. 여인형 사령관도 함께였다. 윤석열의 계획에 반기를 든 신원식 장관과 조태용 원장은 모임에서 제외됐다. 평소에도 윤석열은 기회만 되면 ‘우리 사회 곳곳에 암약하는 반국가 세력을 정리하지 않고는 대한민국의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김용현 처장이 직접 들은 것만 100번이 넘었다. 이 자리에서는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윤석열이 “계엄에 대한 수위 높은 이야기(2024년 12월24일 여인형 검찰 진술)”를 꺼내자, 김용현 처장이 움직였다. 먼저 윤석열의 계획을 실현할 현역 장군들을 ‘엄선’했다.

“이 4명이 대통령께 충성을 다하는 장군입니다.” 김용현 처장은 2024년 6월17일 강호필 합동참모본부 차장(이후 지상작전사령관), 곽종근 특수전사령관, 여인형 방첩사령관, 이진우 수도방위사령관을 한 사람씩 가리키며 윤석열에게 소개했다. ‘굉장히 중요한 사람들’이라고도 덧붙였다. 중장급 사령관이라고 하더라도 대통령을 따로, 그것도 안가에서 만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장군들은 ‘대통령에게 격려받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윤석열은 이들과 ‘소맥’을 마시는 2시간30여분 동안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해 언론계, 노동계 등 정부에 비판적인 세력을 향한 적대감을 쏟아냈다.
이 가운데 여인형 사령관에게 윤석열은 보다 더 구체적인 계획을 공유했다. 2024년 7~8월 여름의 어느 토요일, 윤석열은 대통령 관저로 찾아온 여인형 사령관에게 갈아둔 오렌지주스를 건네며 체포해야 할 정치인·민주노총 관계자 이름을 하나하나 읊었다. 각각 인물에 대해 품평하고는 여인형 사령관에게 “현재 사법체계하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비상조치권을 사용해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윤석열의 계획은 국방부 장관을 신원식에서 김용현으로 교체하면서 본격화됐다. 2024년 8월12일 국방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된 김용현은 그해 9월6일 장관 자리에 올랐다.
2024년 10월1일, 국군의날 행사가 크게 열렸다. 국방부는 10년 만에 재개한 국군의날 시가행진을 2년 연속으로 진행하며 국방력을 과시했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군의 ‘사기 진작’을 마친 뒤, 주요 인사들이 본격적인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 다시 대통령 관저에 모였다. 같은 날 저녁 8시쯤 윤석열은 대통령 관저에 김용현 장관과 곽종근·여인형·이진우 사령관을 불러 ‘소맥’을 마셨다. 윤석열은 이들에게 “현재의 사법체계, 방탄 국회, 재판 지연 상황하에서는 이재명 대표 같은 사람을 어떻게 할 수 없다. 비상대권을 통해 조치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통령 관저 인근 국방부 장관 공관으로 자리를 옮긴 뒤에는 더 자세한 구상이 공유됐다.
“그날 대통령 관저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국방부 장관 공관으로 이동해 김용현 장관, 저, 여인형 사령관, 이진우 사령관이 함께 티타임을 가질 때, ‘확보해야 할 장소’에 관한 얘기가 나왔다. 주로 김용현 장관이 장소를 언급했는데 국회, 선관위, 민주당사 등에 관한 얘기를 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 각 사령관들이 비상계엄을 모의하고 준비한 구체적 정황이 확인된다. 이진우 사령관은 2024년 10월15일부터 비상계엄 관련 내용을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검색하기 시작했다. ‘평양 상고(공) 무인기(10월15일)’ ‘선거 출구조사(10월16일)’ ‘(2023년 9월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표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한) 유창훈 판사(10월23일)’ ‘화성 ICBM(11월4일)’ ‘국회의사당(11월9일)’ ‘한동훈 당 게시판 조작(11월9일)’ ‘(2024년 11월 이재명 대표 위증교사 혐의 사건 1심 무죄판결을 내린) 김동연(‘김동현’의 오타) 판사 면직(11월27일)’ ‘쇠지렛대(12월2일)’ ‘문을 열거나 부수는 데 사용하는 도구(12월2일)’. 비상계엄 당일인 2024년 12월3일 아침 7시에는 이 문장을 검색했다. ‘국회 해산이 가능한가요.’

일찍이 윤석열에게 ‘정치인 체포’ 언질을 받은 여인형 사령관도 준비해야 할 것들을 휴대전화 메모장에 차근차근 남겼다. ‘포고령 위반 최우선 검거 및 압수수색, 휴대폰, 사무실, 자택 주소 확인-행정망, 경찰망, 건강보험 등(10월27일).’ 행정망, 경찰망, 건강보험 정보 등을 활용해 포고령 위반자로 (간주해) 검거할 이들의 휴대폰, 사무실, 자택 주소를 확인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구체적인 명단도 있었다. ‘김현지, 강위원, 정진상, 이석기(11월4일)’ ‘이재명, 조국, 한동훈, 정청래, 김민석, 우원식, 이학영, 박찬대, 김민웅, 양경수, 최재영, 김어준, 양정철, 조해주(11월9일)’. 여인형 사령관의 메모에선 ‘점령, 출입 통제, 현장 보존, 이후 군검경 합동 수사(10월27일)’ 등 ‘선관위 부정선거자’들을 수사하기 위한 계획도 확인됐다.
여인형 사령관은 “누가 계엄사령관이 되든 계엄이 선포되면 법대로, 기계적으로 한다(2024년 12월30일 군검찰 진술)”라고 생각했다. 2024년 11월5일에는 휴대전화에 이런 메모를 쭉 적어 내려갔다. ‘ㅈㅌㅅㅂ(지상작전사령관, 특수전사령관, 수방사령관, 방첩사령관의 초성) 4인은 각오하고 있음’ ‘ㅇ(육군참모총장)을 신뢰할 수 없음(*ㅈㅌㅅㅂ)’ ‘보안 위험. 이너로 들어오면 안 됨’ ‘회합은 ㅌㅅㅂ(특수전사령관, 수방사령관, 방첩사령관)로 한정’ ‘적 행동이 먼저임’ ‘적의 여건을 조성’ ‘결정적인 호기’ ‘오판하지 않도록 직언 드림’(*표기는 원문 속 괄호 내용). 여인형 사령관이 위 메모를 작성하기 전후로, 곽종근·여인형·이진우 사령관 사이에선 수시로 전화가 오갔다.
2024년 11월9일 국방부 장관 공관에서 ‘중간 점검’ 자리가 열렸다. “이따 대통령님 오시면 각자 한마디씩 하게 시킬 거니까 준비하고 있어라.” 김용현 장관이 말했다. 윤석열이 도착하자 소주와 맥주를 섞은 술잔이 돌기 시작했다. 윤석열은 “(2024년 11월14일 출국해) APEC에 다녀올 것이다. 비상대권이라도 써서 나라를 정상화시키면, 주요 우방국들도 지지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령관들은 여인형·곽종근·이진우 순으로 윤석열에게 ‘(각 사령부의) 준비·출동 태세를 잘 갖추겠다’라는 취지로 보고했다. 이진우 사령관은 “그때 대통령이 엄청 취해서 부축이 필요한 상황이었다”라고 2024년 12월19일 군검찰에 진술했다.
2024년 11월30일 저녁 8시, 김용현 장관이 공관으로 여인형 사령관을 불러 비상계엄이 임박했음을 통보했다. “조만간 계엄을 하는 것으로 대통령이 결정할 거다. 더 이상 이 난국을 두고 볼 수 없다. 국회를 계엄군이 통제하고, 계엄사가 선관위와 ‘여론조사 꽃’ 등의 부정선거와 여론조작의 증거를 밝혀내면 국민들도 찬성할 것이다.” 여인형 사령관은 “그 전에도 그런 말을 수차례 했지만 그날은 발언의 정도와 수위가 아주 높았다”라고 2024년 12월14일 검찰에 진술했다. 김용현 장관은 그 전주부터 윤석열이 비상계엄 선포를 결심할 때를 대비해, 계엄 선포문과 대국민 담화문, 포고령 초안을 준비하고 있었다.
2024년 11월30일 밤 10시쯤 두 사람이 대통령 관저로 향했다. 윤석열은 맥주를 꺼냈다. 당시 야당의 감사원장 탄핵·예산 삭감 시도를 들며 “헌법상 비상조치를 해야 이 난국을 해결할 수 있다”라고 토로했다. 다음 날인 2024년 12월1일에도 윤석열은 김용현 장관을 찾았다. 김 장관에게 “지금 계엄을 하게 되면 병력 동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냐” “계엄을 하게 되면 필요한 게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김 장관이 “비상계엄 요건에 대한 법적인 검토가 필요하다”라고 답하자, 윤석열은 법전을 찾아본 후 “지금 국회의 패악질과 관련해 이 정도면 사법과 행정의 기능이 현저하게 저하된 게 맞다. 국가비상사태에 준한다고 보면 되겠다”라고 결론지었다.
“야시장비 휴대, 쇠지렛대와 망치, 톱 휴대”
여인형 사령관은 윤석열, 김용현 장관과 2024년 11월30일 회동한 뒤 “비상계엄이 임박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하려고 해도 국무회의에서 막히겠지’라고 생각했다”라고 2024년 12월24일 검찰에 진술했다. 하지만 다음 날에도 그는 비상계엄 선포 이후를 상정하고 준비했다. 2024년 12월1일 오후 3시경 휴대전화 메모장에 ‘경찰/조본(국방부 조사본부) 30명 위치 파악, 합동체포조 운용’ ‘방첩 5, 군사경찰 5, 경찰 5, 경호 5 기준 20명 1개 팀’ ‘합동체포조 작전 개시’ ‘출국금지’라고 쓰는 등 비상계엄 선포 뒤에 할 일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2024년 10월1일 열린 국군의날 기념식에서 윤석열이 김용현 국방부 장관과 함께 사열 차량을 타고 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이진우 사령관도 마찬가지였다. 2024년 12월2일 오전 11시경, 그는 자신의 휴대전화에 ‘의명(명령에 따른) 행동화 절차를 구상해보았습니다’라는 제목의 메모를 작성했다. 내용은 이렇다. ‘최초 V(대통령)님 대국민 연설 실시 전파 시. 1. 전 장병 TV 시청 및 지휘관 정위치 지시. 2. 전 부대 장병 개인 휴대폰 통합 보관 조치 및 영내 사이버망, 인터넷망 폐쇄 지시. 3. OOOTF 병력 대상, 흑복 및 안면마스크 착용, 컬러 태극기 부착, 야시장비 휴대, 쇠지렛대와 망치, 톱 휴대, 공포탄 개인 불출 시행.’ ‘장관님 회의 직후. 1. 수호신TF 출동 지시. 2. 대테러 대기부대 선투입, (국회) 본관 배치. 3. 후속대 1개 대대 투입, (국회)협력단 지원하 구역 세밀 배치. 4. (필요 시) 서울시장, 경찰청장과 공조 통화 실시. 5. 작전 중간보고(장관님).’
12·3 비상계엄은 준비된 작전이었다. 대통령 안가와 대통령 관저는 ‘내란 모의’를 위한 아지트로 쓰였다. 윤석열은 이곳에 수시로 김용현 국방부 장관과 곽종근·여인형·이진우 사령관을 불러모았다. 윤석열의 지시는 김용현 장관과 각 사령관을 통해 구체화됐다. 하지만 설사 계엄 요건을 갖췄다고 하더라도, 계엄은 윤석열이 단독으로 선포할 수 없다. 계엄법에 따라,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기 위해선 반드시 국무회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12·3 비상계엄은 요건도 갖추지 못한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계엄이었다. 12·3 비상계엄 선포 직전, 국무위원 11명은 한자리에 모였다. 그런데 왜 비상계엄 선포를 막지 못했을까? 이번에는 국무위원 11명이 모였던 대통령실 5층 대접견실로 가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