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의 공간

12·3 비상계엄의 공간을 다시 밟는다.
그곳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다.

내란의 공간

③ 국군방첩사령부

‘이거 미친놈이다’ 정치인 체포조는 존재했다

윤석열은 탄핵심판 내내 홍장원 국정원 1차장의 증언을 흔들며 ‘정치인 체포조 운영’을 부인했다. 그러나 그날 밤, 체포조 명단을 받은 건 홍 차장뿐만이 아니었다.
2024년 12월11일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가 국군방첩사령부를 압수수색했다. ⓒ시사IN 이명익

2024년 12월11일 검찰 비상계엄 특별수사본부가 국군방첩사령부를 압수수색했다. ⓒ시사IN 이명익

‘이재명·우원식·한동훈·조해주(전 중앙선관위 상임위원)·조국·양경수(민주노총 위원장)·양정철·이학영(국회부의장, 민주당)·김민석·김민웅(김민석의 형)·김명수·김어준·박찬대·정청래.’

윤석열 탄핵심판 과정에서 여러 차례 오르내린 정치·사법·언론 분야 인사 14명의 이름이다.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을 통해 이들을 중심으로 초당적 숙청을 벌이려 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군과 경찰, 국정원 등을 총동원해 14명을 체포·구금하려 했다는 이른바 ‘체포조 운영’ 의혹이다.

체포조 의혹은 윤석열의 5가지 탄핵 사유(△비상계엄의 정당성 △포고령 1호 위헌성 △군경의 국회 봉쇄와 표결 방해 △선관위 불법 점거 △체포조 운영) 중 하나였다. 그리고 이 가운데 가장 논란이 컸던 쟁점이다. 헌법재판소는 5가지 사유가 전부 인정된다며 윤석열을 파면했지만, 윤석열 쪽은 여전히 체포조 운영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윤석열은 탄핵심판 내내 체포조 운영을 폭로한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며 그의 증언을 흔들었다. 14명의 체포 대상 명단을 적은 이른바 ‘홍장원 메모’가 신빙성이 없고 실체도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시사IN〉이 확인한 12·3 비상계엄 사태 관련자들의 진술조서를 종합하면, 체포조 명단과 관련 지시는 홍장원 1차장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니었다. 윤석열-김용현→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을 통해 복수의 기관과 관계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파됐다. 이 지시로 방첩사 부대원 10개조 총 49명, 경찰 50명 등 군경이 공조해 체포조를 구성했고 국회로 출동했다.

1월22일 국회 내란 국조특위 1차 청문회에 출석한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 ⓒ시사IN 신선영

1월22일 국회 내란 국조특위 1차 청문회에 출석한 홍장원 전 국정원 1차장. ⓒ시사IN 신선영

“시간이 없습니다. 그냥 불러드릴게요.” 2024년 12월3일 밤 11시6분, 홍장원 국정원 1차장(이하 당시 직책)에게 전화를 건 여인형 방첩사령관이 말했다. ‘이재명, 우원식, 한동훈···’ 낯익은 이름이 하나씩 들려왔다. 홍 차장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통화에 대해 이렇게 떠올렸다. “여 사령관이 불러주는 명단을 적었는데, 첫 이름이 이재명이 나오면서 ‘어, 이거 이상한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다음으로 우원식, 한동훈 이름이 나오자 이거는 뭐가 잘못되었다. 정상이 아니다 생각이 들었다. 이후 명단을 듣다가 ‘이거 미친놈이다’라고 생각이 들어서 그다음은 제대로 적지도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윤석열로부터 시작됐다. 홍장원 차장은 여인형 사령관과 통화하기 직전인 밤 10시53분, 윤석열에게 전화를 받았다. 전화 통화 내용에 대한 홍 차장의 설명이다. “제가 대통령의 전화를 받았는데, 대통령께서 첫 말씀이 뭔가 흥분해서 자랑하듯이 ‘봤지? 비상계엄 발표하는 거’라고 하기에 ‘네 봤습니다’라고 답변드리니, 바로 ‘이번 기회에 싹 잡아들여, 싹 다 정리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계속해서 ‘국정원에도 대공 수사권을 줄 테니까 우선 방첩사를 도와, 지원해. 자금이면 자금, 인력이면 인력, 무조건 도와’라고 지시하셨다.”

2월20일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윤석열 탄핵심판 10차 변론에 증인으로 출석해 제출한 ‘정치인 체포 명단’ 메모. ⓒ헌법재판소 제공

2월20일 홍장원 전 국가정보원 1차장이 윤석열 탄핵심판 10차 변론에 증인으로 출석해 제출한 ‘정치인 체포 명단’ 메모. ⓒ헌법재판소 제공

홍장원 차장은 당시 윤석열의 지시가 ‘우선 방첩사를 도우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구체적인 임무는 방첩사가 진행하고 국정원은 지원 업무를 하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한다. 방첩사와 이야기를 해야 대통령의 지시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있다고 생각해 여인형 방첩사령관과 전화 통화를 했고, 이 과정에서 체포 명단을 전달받았다는 게 홍 차장의 진술이다. 여 방첩사령관은 명단을 불러준 이후 “1조, 2조가 축차 검거 후에 방첩사 구금시설에서 감금 조사할 예정이다. 지금 제일 급한 게 (14명 체포 대상자) 검거를 위한 위치추적인데, 위치추적을 부탁드립니다”라고 설명했다.

홍장원 차장과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이 통화 8분 전인 밤 10시58분 한 차례 먼저 전화 통화를 했다. 그러나 당시 통화에선 여 방첩사령관이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홍장원 차장은 검찰 조사에서 “그쪽(방첩사)도 난리가 나서 통화를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서 여 사령관이 폰만 들고 다른 일을, 바쁜 일을 하고 있어서 대화를 나눌 상황이 아니었다”라고 설명했다.

홍장원 차장과 첫 번째 통화했던 그 시각,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실제로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고 전달할 상황이 아니었다. 홍 차장에게 불러준 14명의 명단을 자신의 참모진에게 불러주고, 후속 임무 지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육군총장이 국방부에 들어와 있다. 국무위원들이 들어온다더라. 너네들은 알고 있어야지.” 12월3일 밤 9시,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정성우 방첩사 1처장과 김대우 방첩사 수사단장 등 주요 참모진 호출을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곧 계엄이 선포될 것이라는 취지였다. 여 사령관은 “조금 늦어질 것 같아”라며 “어르신들(국무위원)이 잘 하겠지? 반대하겠지? 말리겠지?”라고 말했다.

12・3 정치인 체포・선관위 장악작전 지휘체계

12・3 정치인 체포・선관위 장악작전 지휘체계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호출한 방첩사 참모진이 다 모인 시점, TV에서 윤석열이 계엄을 선포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왕좌왕했다. 어디선가 “김용현 장관님이 주관하는 긴급 주요 지휘관 회의가 진행된다고 합니다. 방첩사도 들어오셔야 합니다”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그러자 여인형 사령관은 곧바로 김대우 단장을 불렀다.

김대우 단장은 검찰 조사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여인형) 사령관님이 말씀하시기를 김용현 장관님으로부터 명단을 받았다면서 저보고 수첩에 받아적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구금시설이 어디 있냐. 수방사 B1 벙커로 해야겠다’라면서 수사관들을 출동시켜서 명단에 있는 사람들을 잡아서 수방사로 이송시키라고 했습니다.” 김 단장을 이 지시를 받은 시점을 밤 11시께로 기억했다.

계엄 전 이루어진 ‘인물 품평회’

김대우 단장이 여인형 사령관으로부터 받은 지시는 크게 두 가지였다. ①경찰 국가수사본부에서 100명, 국방부 조사본부에서 100명을 지원받기로 했으니 방첩사 수사관들을 소집해 합동수사단을 구성하라 ②명단 속 14명을 체포하고 구금하라는 것이었다. 여 사령관 지시를 받고 구민회 수사조정과장 등 지휘부를 불러 임무를 전파하고 계획을 구체화했다. 방첩사와 경찰, 국방부 소속 수사관을 각각 5명씩 배치해 팀을 구성하고, 영내 체육관에 집결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 밖에 체포 대상자 구금을 위한 수방사 B1 벙커 ‘답사’ 지시도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구민회 과장이 14명의 체포 대상자 명단을 받아 적어 메모로 남겼다. 구 과장은 검찰 조사에서 김대우 단장이 명단을 불러준 시점을 ‘오후 11시4분께’라고 특정했다. 이후 구 과장은 경찰과 국방부에 각각 연락해 합동수사본부 구성과 ‘체포조 운영’을 위한 수사관 파견을 요청했다.

여인형 사령관이 체포 대상 14명의 명단을 공유한 건 방첩사 참모진과 홍장원 1차장 외에 더 있다. 조지호 경찰청장이다. 여 사령관은 밤 10시30분께, 조지호 청장에게 텔레그램으로 전화를 걸었다. 방첩사 참모진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할 시점이었다. 조지호 청장 검찰 진술조서에 따르면, 당시 여 사령관은 “정치인 명단 15명 정도를 체포할 것인데, 경찰에서 위치를 확인해달라”고 말했다. 시간순으로 정리하면, 여 사령관은 조지호 청장-방첩사 참모진-홍장원 차장 순으로 체포 명단과 구금, 위치추적 등을 전파하거나 공유했다.

여인형 사령관도 체포 명단의 존재를 인정한다. 윤석열 탄핵심판 증인으로 나와서는 대부분의 증언을 거부했지만, 그는 앞선 여러 차례 검찰 조사에서 “비상계엄 선포 직후 김용현 장관으로부터 전화로 명단을 전해들었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김용현 장관으로부터 사전에 명단을 문서나 메모 형태로 전달받지 않고 구두로 들었으나 “금방 알아들었다”라고 했다. 2024년 초부터 비상계엄 선포 직전까지, 윤석열이 대통령 관저, 국방부 장관 공관 등으로 불러 명단에 적힌 인사들의 ‘인물 품평회’를 하면서 “현재 사법체계하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비상조치권을 사용하여 이 사람들에 대해 조치를 해야 한다”라고 자주 말해왔기 때문이다. 여인형 사령관에게는 익숙한 이름들이었고, 왜 체포해야 하는지 의구심을 갖지도 않았다고 한다. 오랜 시간 정치적 타깃 설정이 누적되어 있었고 ‘누구를 잡아야 하는가’는 이미 지난해 11월까지 내부에서 합의된 상태였던 등, 사전 정지 작업이 분명히 존재했다는 뜻이다.

12·3 비상계엄 당시 체포 명단에 올랐던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맨 왼쪽부터).ⓒ국회사진기자단

12·3 비상계엄 당시 체포 명단에 올랐던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한동훈 전 국민의힘 대표, 우원식 국회의장(맨 왼쪽부터). ⓒ국회사진기자단

12월3일 밤, 방첩사는 체포조 10개 팀 49명을 국회에 보냈다. 50명을 준비해둔 경찰과 국회 앞에서 합류하기로 했다. 출동 과정에서 임무가 변경됐다. 12월4일 새벽 1시께 ‘이재명, 한동훈, 우원식 3명을 우선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국회의 계엄 해제 요구안이 의결되기 직전이었다. 그러나 방첩사 수사관들은 국회 인근에 차량을 세워두고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경찰과 합류하지 않았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12·3 비상계엄 사태에서 방첩사는 체포조 외에 다른 임무가 또 있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서버 수사였다. 윤석열이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과천 선관위 청사에 진입해 서버실을 확보한 정보사령부 소속 영관급 장교 10명으로부터 서버를 인계받은 후, 포렌식을 하는 게 임무의 골자였다. 여인형 방첩사령관은 정성우 1처장에게 지시하면서 “서버를 카피하고, 카피 안 되면 서버를 떼어와”라고 말했다.

선관위에는 방첩사 소속 부대원이 4개 조로, 115명이 출동했다. 과천 선관위 청사와 관악 청사, 수원 선관위 연수원, 여론조사기관 꽃이 목표였다. 그러나 이날 출동한 방첩사 부대원 단 한 명도 선관위 청사에 진입하지 않았다. 과천에 출동했던 부대원들은 근처 편의점에서 라면을 사먹고, 산책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국회에서 계엄 해제 요구안이 의결되자 철수했다.

사령관은 적극적, 부대원은 소극적

여인형 사령관은 비상계엄이 해제된 직후 각 지휘관들에게 증거인멸을 지시했다. “어제(12월3일) 일이 문제 될 수 있을 것 같으니, 나중에 수사에 대비해서 할 수 있는 조치를 미리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송이나 구금 지시는 안 받고 맹목적으로 출동했다’라고 진술해줄 수 있는 부대원들에게 그렇게 내용을 정리해서 메모를 하도록 하라”고도 지시했다. 계엄 선포 이후 작성한 서류와 문서, 메모도 모두 파기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방첩사 간부 대부분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수사기관이 압수수색을 나오면 찾기 쉽도록 일부러 책상 위에 올려두고 퇴근하거나, 아예 증거인멸 지시 자체를 전파하지 않기도 했다.

국회, 선관위 임무 수행과 증거인멸 지시 거부는 모두 방첩사 참모진의 판단이었다. 여인형 사령관의 지시를 받아 체포조를 구성하고 현장 출동까지 지시했지만 이 과정에서 ‘불법·부당 명령’이라고 판단해 자체적으로 항명했다. 참모진의 검찰 진술을 종합하면, 당시 판단은 △계엄사령부가 개소하지 않고, 여인형 사령관이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되지 않았는데도 합수본부장인 것처럼 상황이 진행되고 있다 △방첩사 부대원이 출동할 때 합수본 소속인지 방첩사 소속인지 불분명하다 △비상계엄 절차와 정당성 자체가 헌법 및 법률 위반 소지가 크다는 해석에서 내려졌다. 국회의 경우 현장에 시민이 많이 모인 것을 확인한 방첩사 간부들의 충돌 우려도 판단에 영향을 미쳤다.

2024년 12월4일 김어준씨 측이 “계엄군이 유튜브 스튜디오 건물을 봉쇄했다”라며 영상을 공개했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유튜브 갈무리

2024년 12월4일 김어준씨 측이 “계엄군이 유튜브 스튜디오 건물을 봉쇄했다”라며 영상을 공개했다. ⓒ‘김어준의 겸손은 힘들다’ 유튜브 갈무리

계엄이 선포되면 방첩사령관은 초월적인 권한을 가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된다. 12·12 군사 쿠데타 직후 전두환이 이 역할을 맡았다. 여인형 사령관은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와 동시에 합수본부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던 만큼, 이번 사태에 연루된 군사령관 중에서도 핵심이었다. 그가 비상계엄 선포 직후 신속하고 구체적으로 지휘를 했던 이유다.

결과적으로 이번 비상계엄 사태에서 모든 군을 통틀어 방첩사는, 사령관은 가장 적극적이었고, 참모진과 부대원은 가장 소극적이었다. 체포 명단과 체포조 운영은 실제로 존재했고 비상계엄 선포를 ‘신호탄’ 삼아 실행 직전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 과정 자체만으로도 위헌·위법적 행위다. 실행 직전 단계에서 작전을 멈춘 것 역시 윤석열-김용현-여인형의 명령이 아니라, 현장의 ‘항명’이었다. 윤석열 파면을 결정한 헌법재판소는 “비상계엄 해제는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 임무 수행 덕분이었다”라고 밝혔다.

문상현 기자이은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