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의 공간

12·3 비상계엄의 공간을 다시 밟는다.
그곳에 아직 꺼지지 않은 불씨가 있다.

피고인석 2열 앉은 그 남자의 ‘눈 가리고 아웅’

4월14일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에 대한 1차 공판에서 윤석열은 12·3 비상계엄이 “평화적인 대국민 메시지 계엄”이라고 주장했다. 두 군인이 증언하는 그날 밤의 이야기는 다르다.

파면된 전직 대통령 윤석열이 형사법정에 섰다. 4월14일 오전 10시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25부(재판장 지귀연)는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에 대한 1차 공판을 진행했다. 이날 검찰은 윤석열 앞에서 약 1시간 동안 왜 윤석열에게 내란죄가 성립되는지 공소사실(검사가 법원에 심판을 청구하는 범죄사실) 요지를 진술했다. 내란죄는 국가권력을 배제하거나 국헌을 문란하게 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자에게 적용되는 혐의다(형법 제87조). 내란 우두머리 혐의가 인정되면, 피고인 윤석열에게 처해질 형량은 사형이나 무기징역, 무기금고뿐이다.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가운데)이 4월14일 형사재판이 열리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은 피고인 윤석열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전현직 군·경찰 고위직과 공모해, 전시·사변 또는 이에 준하는 국가비상사태 징후가 없었는데도 위헌·위법한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등 국헌 문란을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켰다고 진술했다. “피고인은 위헌·위법한 포고령에 따라 헌법기관의 권능 행사를 불가능하게 하고 정당제도 등 헌법과 법률의 기능 소멸을 목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 군경을 동원해 국회와 선관위, 민주당사 등을 점거해 출입을 통제하고 한 지역의 평온을 해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피고인 윤석열은 검찰 모두진술 중간중간 옆에 앉은 윤갑근 변호사와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대부분 시선을 아래로 둔 채 잠자코 공소사실을 들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검찰 진술이 끝나자 윤석열은 마이크를 잡고 “2024년 12월3일 한밤 10시30분경부터, 그날 새벽 한 2~3시까지의 몇 시간 동안의 상황을, 조사된 내용을 주욱 나열식으로 기재한 공소장이라고 보고 있다”라고 말을 시작했다. 이후 “비폭력적으로 국회의 해제 요구를 즉각 수용해서 해제한 몇 시간의 사건을, 조서를 거의 공소장에다가 박아넣은 것 같은, 이걸 내란으로 구성했다는 거 자체가 참 법리에 맞지 않다”라며 79분간 목소리를 높여 모든 공소사실을 항목별로 부인했다.

이날 첫 공판에는 피고인 윤석열과 함께, 윤석열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한 직후 국회로 출동한 두 영관급 군인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조성현 수도방위사령부 제1경비단장(대령)은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제1경비단 소속 136명에게 국회 출동을 지시했고 이 중 38명을 국회 경내에 투입시켰다. 김형기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특전대대장(중령)은 이상현 전 특전사 제1공수여단장의 지시에 따라, 부대원 133명과 함께 국회로 출동했고 김 중령을 포함한 49명이 담장을 넘어 국회 경내에 진입했다.

조성현 수방사 제1경비단장(왼쪽)과 김형기 특전사 제1특전대대장. ⓒ시사IN 박미소, 국회 유튜브 갈무리

윤석열은 이날 재판에서 12·3 비상계엄이 “평화적인 대국민 메시지 계엄”이라고 주장했다. 조성현 대령과 김형기 중령, 두 군인도 ‘평화적 메시지 계엄’이라고 생각하고 국회에 총기를 든 부대원을 투입시키고, 직접 담을 넘어 국회 경내에 진입했을까? 두 사람이 증언하는 그날 밤은 윤석열의 말과는 다르다. 4월14일 조성현 대령·김형기 중령의 재판 증언과 함께 〈시사IN〉이 확인한 두 사람의 검찰 참고인 진술, 작전 상황일지(작전 경과), 당시 현장 지휘관들의 통화 내용 등을 토대로 윤석열 주장을 다시 따져봤다.

■ 평화적 계엄?

윤석열은 “평화적인 대국민 메시지 계엄” 주장의 근거로 ‘계엄 진행 과정’을 들었다. “절대 실탄 지급하지 말고 실무장하지 않은 상태로 투입하되 민간인과의 충돌은 절대 피하라고 지시를 했기 때문에 이것이 평화적인 대국민 메시지 계엄이지, 이것이 단기간이든 장기간이든 군정을 실시하고자 하는 계엄이 아니라는 건 계엄 진행 경과를 볼 때 너무 자명하다” “계엄 선포하고 난 후에 실무장하지 않은 소수의 병력을 이동시켜서 질서 유지에 투입하도록 조치했다.”

윤석열에게 내란죄를 적용하려면, 12·3 비상계엄에 국헌문란의 ‘목적’이 있었는지, 국헌문란의 수단이 ‘폭동’이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국헌문란은 ‘헌법 또는 법률에 정한 절차에 의하지 아니하고 헌법 또는 법률의 기능을 소멸시키는 것’ 또는 ‘헌법에 의하여 설치된 국가기관을 강압에 의하여 전복 또는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형법 제91조). 윤석열은 내란죄가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12·3 비상계엄이 ‘평화적’ ‘경고성’ ‘메시지’ 계엄이었고, 국회에 군을 투입한 목적도 ‘질서 유지’를 위해서였다는 주장을 반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특전사는 실탄을 준비해 국회로 향했다. 이상현 당시 1공수여단장이 탑승한 지휘 차량에는 소총용 5.56㎜ 실탄 550발, 권총용 9㎜ 실탄 12발이 적재되어 있었다(국방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12·3 비상계엄 당시 1공수여단이 주둔지 밖으로 들고 간 탄약은 실탄 3207발을 포함해 모두 3305발이다). 특전사 김형기 중령이 이날 재판에서 비상계엄 해제 후 이 사실을 알게 됐다며 1공수여단의 실탄 외부 반출 사실을 확인하자, 피고인 윤석열은 “재판장님”이라면서 급하게 끼어들었다. “군대가 빈 총만 들고 이동하는 건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제가 실무장하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건 개인 화기를 가지고 있는 군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실탄을 나눠 주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러자 김형기 중령은 “탄에 대해서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라고 말을 이어갔다. 김형기 중령이 실탄을 챙기지 않은 건 자체적인 판단이었다. “탄을 가지고 가지 않은 건 저희밖에 없다. 그때 탄을 왜 안 가져갔냐면, 사령부에서 최초로 VTC(화상 회의)로 지시하면서 ‘탄은 실탄과 공포탄을 휴대하되 대대장과 지역 대장이 가지고 있어라’는 지침을 하달했다. 당시 저희 부대 상황을 봤을 때, 탄약고를 개방해야 할 실무자들이 비상소집 명령을 늦게 하달받고 늦게 출근하다 보니, 출동 문제로 인해서 제가 부대를 그냥 출발시켰다.” 헌법재판소도 윤석열 탄핵심판에서 “실탄 지급을 금한 건 군인들 스스로가 상황 판단에 따라 자체적으로 결정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 질서유지를 위한 계엄?

윤석열은 이날 재판에서 ‘의원을 끌어내라’고 지시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수방사령관은 출동 지시만 받았고 (···) 그 안에 들어가서 누구를 끌어내고 무슨 국가나 공공기관 임무에 대한 저지 행위를 하는 임무 자체를 부여받은 적 없다고 분명히 진술하고 있다.”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은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되기 전, 윤석열이 화가 난 상태로 ‘4명이 들어가면 한 명씩 들어낼 수 있지 않냐, (국회 본회의장) 안에 있는 사람 끌어내라’ ‘문을 부수고 들어가서 끄집어내라’고 지시했다고 2024년 12월17일 검찰에 진술했다. 그러나 지난 2월4일 윤석열 탄핵심판 증인으로 출석해서는 대통령에게 ‘국회 본관 출입을 막고 계엄해제 의결을 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 없다고 말을 바꿨다.

2024년 12월3일 비상계엄 선포 이후, 무장한 계엄군이 국회 경내에 대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날 재판에서 수방사 조성현 대령은 상관인 이진우 전 수방사령관에게 ‘국회 본청 내부로 진입해 국회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조 대령은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윤석열 앞에서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0시30분부터 1시 사이에는 (국회) 경내에 35특임대대 15명이 들어가 있는 상태였고, 35특임대대 후속부대 23명이 월담을 시도하기 위해 노력하는 상황, 2특임대대 후속부대가 이동하는 상황이었다. 그 상황에서 사령관이 나한테 그런 임무를 줬고, 알겠다고 답변한 이후에, 사령관에게 다시 전화해 ‘저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아니고, 특전사령관과 소통하라’고 말했다.” 조 대령이 이 사실을 증언하는 내내 윤석열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옆자리 윤갑근·위현석 변호사와 상의했다.

‘의원을 끌어내라’는 지시를 받은 건 특전사 김형기 중령도 마찬가지다. “(이상현 1공수)여단장이 전화로 0시30분에 세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 ‘처음에 담을 넘어가라. 그다음 본청으로 가서 의원들을 끌어내라’고 말했다. 그때 전화를 끊고 ‘국회의사당의 주인은 국회의원인데 무슨 개소리냐’라고 욕했던 걸 부하들이 들었다.” 김 중령은 2024년 12월4일 작성한 12·3 비상계엄 당시 ‘작전 상황일지’에 “병력들에게 여단장님께 부여받은 임무를 알려주지 않았다”라고 썼다. 검찰이 그 이유를 물었다. 김 중령은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는 이 지시가 정당한 지시인지 옳은 판단을 할 수 없었다. 두 번째는 저 임무를 주면 저희 특전사 인원들은 했(을 것이)다. 문을 부수고 의원들을 끌어냈을 거다. 그럼 저도 여기 이 자리에 없었을 것 같다.” 김 중령이 이 답변을 할 때, 윤석열은 물을 한 모금 마셨다.

헌법재판소는 윤석열 탄핵심판에서 “국회가 신속하게 비상계엄 해제 요구 결의를 할 수 있었던 건 시민들의 저항과 군경의 소극적인 임무 수행 덕분”이라고 판단했다. 국회 본청에 진입했던 김 중령도 지시를 따르지 않아 시민들과의 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본청 계단에 가니 (시민들이) 심하게 발로 차고 꼬집고 때리고, (물건을) 집어던졌다. 이 사람들이 우리한테 왜 이렇게 하는지 그때 당시는 잘 몰랐는데, ‘가만히 보니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제대로 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도 들었다. 사실 내 뒤 병력들만 가지고 저 앞을 돌파하려면 할 수 있었다. 돌파를 하기 위해서는 분명히 물리력을 사용해야 한다. 그 시민들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왜 그런 임무를 수행해야 되는지 그 자체에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에 하지 않았다.”

■ 철수를 지시했다?

조성현 대령은 국회로 향하는 후속부대를 지난해 12월4일 새벽 1시4분 서강대교 북단에 멈춰세웠다. “상황이 이례적이었고 목적이 불분명한 임무였다. 일단 후속부대는 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이 가결된 건 같은 날 새벽 1시3분이다. 하지만 사령관 등 상부에서 곧바로 철수 지시가 내려오지 않았다. 수방사 군사경찰단 소속 10명은 새벽 1시40분경에도 국회 정문 옆 담을 넘어 국회에 진입했다. 수방사 제1경비단이 국회 철수에 나선 때였다. 조 대령은 (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 뉴스를 확인하지 않았냐는 검찰의 질문에 “부대가 여기저기 찢어져 있는 상태에서 임무를 수행하다 보면, 그 부대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계속 체크를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차분히 앉아서 (뉴스를) 볼 여력은 안 됐다”라고 답했다.

이 답변 이후인 오후 4시19분, 지귀연 재판장이 오후 4시35분까지 휴정을 선언했다. 그러자 윤석열이 “한 1분만 말하고 싶다”라며 끼어들었다. 재판장이 “휴정 이후 이야기하면 안 되겠냐”라고 했지만 윤석열은 “지금 짧게만 하겠다”라며 발언을 멈추지 않았다. “나 역시도 (계엄 해제 요구안 가결) 보고를 받고 군에 무슨 헬기든 차량이든 이동수단이 도착하지 않더라도 일단 (국회) 경내에서 전부 빼라, 지금 이런 지시가 내려간 상황인데 (조성현 대령이) 그게 뭐 자기들 판단에 의해서 (철수)한다 지금 이런 얘기들을 하고 있다. (···) 증인 신청 순서에 있어서 다분히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가 없다”라며 조성현 대령 증언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다.

2024년 12월4일 새벽 계엄군 병력이 국회에서 철수하고 있다.©연합뉴스

1차 공판에서 윤석열의 발언 시간은 79분의 모두진술을 포함해 총 93분이었다. 윤석열은 고압적인 태도로, 검찰이 조성현·김형기 증인을 신문하는 중간중간 끼어들었지만 재판부는 별다른 제재를 하지 않았다. 윤석열의 직접 증인신문을 제한한 헌법재판소와 대비된 모습이었다. 문형배 재판관은 당시 “피청구인(윤석열)의 지위가 국정 최고 책임자이기 때문에 그 산하에 있는 증인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고 해서 직접신문보다는 대리인을 통해서 하는 게 좋겠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검찰 증인신문 동안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윤석열 측은 정작 반대신문은 준비하지 못했다며 다음 기일(4월21일)로 미뤘다.

재판부는 이 밖에도 피고인석에 앉은 윤석열의 촬영을 불허하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 지나치게 윤석열 측에 특혜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난이 일자 4월17일 재판부는 2차 공판 촬영을 허가했다. 이날 첫 공판에서 윤석열은 이례적으로 변호인들에게 둘러싸여 피고인석 2열에 앉아 있기도 했다. 검사석에서도 기자들이 앉은 방청석에서도 잘 보이지 않는 위치였다.

이은기 기자